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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음악

국악과 전자음악이 만났을 때 – 새로운 울림을 향해

by muasis 2025.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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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국악을 작곡하며

저는 대학교 시절부터 국악과 서양음악을 결합한 퓨전국악을 작곡해오고 있습니다.
가야금의 여운 위로 신시사이저 패드를 얹고, 삼채장단에 루프 리듬을 더하면 낯설면서도 새로운 소리가 떠오릅니다.
전통과 현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서로 조심스럽게 대화하는 순간이죠.

이 작업을 시작한 건 단순한 실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음악을 하다 보니 ‘이 소리들로 내가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고, 그 질문 끝에 제가 선택한 언어가 국악이었습니다.

국악은 어떤 음악일까?

국악은 오래된 음악일지 몰라도 악기들에는 사람의 숨결과 비슷한 무언가가 담겨 있습니다.

처음 해금 소리를 접했을 때, 그 얇고 떨리는 소리에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건 단지 악기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울음이나 한숨처럼 들렸죠.
그 정서는 어떤 신시사이저도, 미디 노트도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습니다.

전자음악, 감정을 조형하는 기술

한편 전자음악은 제가 익숙하게 다뤄온 세계입니다. 미디, 샘플링, 신시사이저, 루프…
전자음악은 정교하고, 논리적이고, 무엇보다 창의적입니다. 마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예술 같기도 하죠.

그리고 저는 문득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강력한 기술을, 국악이라는 살아있는 감정에 입히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가야금과 전자음악세트

퓨전 그 이상의 작업

사실 국악과 전자음악을 융합한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국악 루프 만들기" 정도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 작업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하며, 때로는 예상외로 민감합니다.

전자음악은 구조적으로 매우 규칙적인 편입니다. BPM이 딱 맞고 루프가 반복되며, 신스는 정확한 파형을 그립니다.
반면 국악은 유동적이고, 시김새가 많고, 한음 안에도 감정이 담겨 있죠. 이 둘을 연결하려면 하나를 포기하거나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공간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작곡할 때 자주 묻습니다.
“이 장단은 여기에 어울릴까, 아니면 리듬을 해체해야 할까?”
“신시사이저가 감정을 해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고민은 단순한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왜 국악이었을까

저는 피아노를 전공했고, 재즈도 좋아하고, 오케스트레이션에도 익숙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돌아온 곳이 국악이었습니다.

국악을 택한 이유는 단지 ‘우리 것’이라는 애착 때문만은 아닙니다.
국악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결이 있고, 그 결은 지금의 일상이나 마음과 어딘가 닿아 있습니다.
현대적인 삶과 너무 멀어 보였던 이 음악이, 막상 깊게 들여다보니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기에 더없이 적절한 도구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만드는 음악은 누구를 향하는가

작곡을 하면서 늘 마음속에 두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음악은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은가?”
“이 음악을 들은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퓨전국악을 만들면서 느끼는 건, 음악이 전통을 계승하는 방식이 꼭 ‘보존’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언어로 다시 말하고, 다시 노래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해외에서 한국 음악이 주목받는 지금, 국악은 아직도 가능성이 무한한 원석 같은 존재입니다.
지금은 EDM이 대세라 해도, 언젠가는 해금이 이끄는 클럽 트랙, 장단이 이끄는 록 비트가 더 자연스러워질 날이 올 수도 있겠죠.

음악은 계속해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전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시 쓰이고,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전자음악이라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술을 통해 옛 소리를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불러오는 것도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단순히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소리가 끝나고 남는 것들

국악과 전자음악이 만날 때, 그것은 단순한 장르 혼합이 아닙니다.
두 감정, 두 시간, 두 감각이 서로를 탐색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과정이죠.

이 음악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감동으로 닿는다면, 그 속 어딘가에 제가 만든 소리 하나쯤은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울림이 또 다른 창작자에게 전해져, 새로운 소리로 다시 피어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작업은 충분히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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